시간을 담아내기 위한 작가의 규칙
- 미학적 잡담
- 2019. 6. 25. 12:54
1945년 8월 15일이라는 시간의 표기에 ‘광복이 이뤄진 역사적인 날’이라는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이유는 해당 날짜에 광복이라는 기념적 사건이 이뤄졌기 때문인데요. 이처럼 우리가 매일 함께하고 있는 시간은 날짜라는 시간의 표기법 속에서 해당 날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혹은 우리가 광복을 기억하듯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의 사건과 변화를 파악하고 정리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죠.
오늘은 날짜 속에서 벌어진 사건에 집중하는 날짜의 평범한 사용법과는 다르게 오직 날짜 자체에만 집중한 작품을 살펴볼까 하는데요. 캔버스에 덩그러니 그려진 날짜가 눈에 띄는 ‘투데이 시리즈’라는 작품입니다. 일본 출신의 작가 온 카와라가 제작한 시리즈 작품인데요. 1966년에 시리즈를 시작해서는 죽음을 맞이한 2014년까지 3천여 점에 가까운 시리즈 작품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50여 년 동안 날짜를 3천여 점 가까이 그려왔다는 사실이 첫 눈길을 끄는 작품인데요. 작가가 캔버스 위에 날짜를 그리며 지켜왔던 독특한 규칙을 알고 나면 눈길을 끄는 것 이상의 흥미를 느껴볼 수 있죠.
작가는 ‘당일에 오직 당일 날짜만을 그린다.’라는 오묘한 규칙을 만들고는 이를 철저하게 지키며 시리즈를 제작했다고 하는데요. 부득이한 사정으로 당일에 작품을 끝내지 못하면 당일 작품을 폐기할 정도로 엄격하게 규칙을 준수했다고 합니다. 또,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날짜는 작가 본인이 체류하고 있는 도시와 국가의 날짜 표기 방법을 그대로 따랐다고 하는데요. 모든 작품은 아니지만, 가끔은 당일의 신문을 이용해 작품의 케이스를 제작한 날짜의 작품도 있죠.
당일의 날짜, 당일의 신문, 당일 체류한 곳의 표기법 등 작가가 투데이 시리즈와 함께 묶어놓은 모든 규칙은 과거의 언젠가에서 만큼은 오늘이었던 시간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이런 특이한 규칙과 작가의 철저한 규칙 준수로 인해 3천여점의 작품이 언제, 어디서 제작됐는지를 어림잡아 파악하며 작가의 인생 거취를 추적해볼 수 있는 재미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이유는 날짜를 그리는 단순한 행동을 특이한 규칙과 이를 지키는 작가의 행동을 통해 작품의 과정을 탄생시켰다는 부분인데요. 그저 캔버스 위에 날짜가 덩그러니 그려진 그림에 불과했을지도 모르는 작품을 작가가 만든 규칙과 이를 지키는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만들었으니 말이죠.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동 외에도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작가의 다양한 행동이 작품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에 담아내기 쉽지 않다 이야기되는 시간과 공간을 굉장히 단순하게 표현해낸 것도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작가의 오랜 행동을 작품의 과정으로 탄생시켰다는 사실이 정말 흥미로운 작품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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