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전통미술에서 현대미술로 넘어오며 작품의 경계는 그림, 조각처럼 특정 매체의 틀을 넘어서기 시작합니다. 현대미술 속 작품은 전통미술과는 다르게 표현과 묘사보다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행위 자체를 의미하기 시작하는데요. 정확히는 작가의 행위를 의미했다기보다 미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행위가 무엇인지 그 자체에 관해 의문을 가졌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다양한 변화와 함께 작품은 캔버스 위에 예쁘게 그려진 그림 외에도 선 하나를 그리거나, 물감을 던지는 작가의 행동을 표현하는 그림 등으로 변화했죠. 그런데 이렇게 '작가의 행위가 작품의 일부다'라고 주장하며 나타난 선 하나 그려진 그림조차 당황스럽게 느끼고 있는 관객을 더욱 당황시키는 작품이 나타나는데요. 오늘은 이런 당황스러움 이상의 당황스러..
사진, 사물, 문자는 서로 딱히 공통점이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세 가지 요소이지만, 사실 사람은 이 세 가지를 굉장히 비슷한 과정으로 인지합니다. 오늘 살펴볼 조셉 코수스의 작품은 이러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인데요. 지나치게 당연한 사실이라 첫 만남에서는 ‘이게 어쨌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지만, 파고들수록 흥미가 느껴지는 숨은 재미를 가진 작품이기도 하죠. 우리의 머릿속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의자에 관한 경험과 함께 ‘의자’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존재하는데요.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의자’의 이미지는 평소 다양하게 만나는 물건 중 무엇이 의자인지를 구별하게 해줍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리가 아프고 피곤할 때 책상이나 밥상에 앉는 실수 없이 그 옆에 놓인 의자에 앉을 수 있..
예술은 언제나 보고, 느낀 것을 묘사하는 행위와 함께 해왔습니다. 돌과 나무를 조각하여 입체적인 조형물이나 조각상을 만들고, 평평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며 입체적인 공간과 사람, 사물을 표현해냈죠. 이렇게 사물, 인물, 공간을 표현해낸 미술은 ‘시간’이라는 새로운 도전과제를 만나는데요. 늘 함께하고 있지만,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시간이라는 존재는 이미 여러 작가에 의해 표현이 시도된 바 있죠. 오늘은 이렇게 미술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시간을 표현해낸 작품 하나를 살펴볼까 하는데요.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라는 쿠바 출신의 미국 작가가 내놓은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시계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무제:완벽한 연인(Untitled:Perfect Lovers)’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인데요. ..
트루이즘(Tru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뻔한 말’, ‘진부한 문구’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진부한 문구'보다는 ‘뻔한 말’이라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는 단어죠. 사실 트루이즘이라는 뻔한 말 안에는 뻔하지만 진부하지만은 않은 문구가 많이 존재하기 때문인데요. '제니 홀저’의 트루이즘 시리즈를 살펴보면 이를 쉽게 느껴볼 수 있습니다. 제니 홀저는 ‘너의 삶을 위해 투표하라.(Vote for your life)’, ‘가장 오래된 두려움은 최악의 두려움이다.(The oldest fears are the worst ones)’ 등 뻔하디 뻔한 트루이즘스러우면서도 진부하지만은 않은 문구를 사람들 앞에 내놓는 트루이즘 시리즈를 제작했는데요. 삶을 위해 투표해야 한다는 사실은 뻔하..
‘그림을 불태운 재로 쿠키를 만든다’라는 문장은 대충 듣고만 있어도 ‘먹는 거로 장난치지 말라’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정신 나간 소리인데요. 실제로 한 작가가 본인이 13년 동안 그렸던 그림을 불태우고 남은 재로 쿠키를 만든 작품이 있습니다. ‘화장 프로젝트’라 이름 붙은 작품인데요. ‘나는 더 이상 지루한 작품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I will not make any more boring art)’라는 작품이 인상적인 ‘존 발데사리’의 작품이죠. 존 발데사리는 1970년 여름, 본인 작업실 근처의 화장소에서 1953년부터 1966년까지 그렸던 본인의 회화 작품 전부를 화장시켜 버립니다. 작가 본인이 불태운 그림 대부분을 슬라이드로 남겨놓았다고 알려졌지만, 그 양이 워낙 많아 얼마나 많은 그림이 화장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