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역작이라 표현되는 ‘모나리자’는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그 눈썹 없는 여자 그림?’이라는 답 정도는 들을 확률이 높은 유명작입니다. 심지어 미술에 관심 있으신 분이라면 다양한 서적, 다큐멘터리, 강의를 통해 이 작품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분석, 뒷배경까지 섭렵하고 계신 분도 많으실 텐데요. 사실 이 모나리자는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의 미술에 관해 생각해볼 때 상당히 좋은 예가 되는 작품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방문해 모나리자를 직접 봤든 진품을 본 적 없이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만 접했든 모두가 함께 알고 있는 작품이니 말이죠. 이처럼 ‘보았다’와 ‘알다’라는 표현에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가 존재하는 것은 원본의 복제품 때문인데요. 여기서 복제품은 모나..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을 구분하는 가장 간단한 기준은 작품이 제대로 끝난 것처럼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가 있습니다. 대개는 카메라의 상용화가 이루어진 19세기를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을 구분하는 기점으로 잡는데요. 전통미술 속 화가보다 세상을 빠르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카메라가 장인의 성격이 강했던 전통미술을 변화시켰다는 것이 미술사의 정설입니다. 번개처럼 나타난 사진 기술에 화가들은 카메라가 할 수 없는 배경 없는 그림, 특이한 색의 그림, 특이한 형태의 그림 등을 탄생시키며 현대미술의 시작점이 됐다는 것이죠. 물론 이를 카메라의 발명만을 원인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산업혁명, 시민혁명 등 과학과 사상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사회 전체적인 변화라는 큰 시각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19세기보다 무려 400년이 빠른 15..
미술이 전통미술에서 현대미술로 넘어오며 작품의 경계는 그림, 조각처럼 특정 매체의 틀을 넘어서기 시작합니다. 현대미술 속 작품은 전통미술과는 다르게 표현과 묘사보다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행위 자체를 의미하기 시작하는데요. 정확히는 작가의 행위를 의미했다기보다 미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행위가 무엇인지 그 자체에 관해 의문을 가졌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다양한 변화와 함께 작품은 캔버스 위에 예쁘게 그려진 그림 외에도 선 하나를 그리거나, 물감을 던지는 작가의 행동을 표현하는 그림 등으로 변화했죠. 그런데 이렇게 '작가의 행위가 작품의 일부다'라고 주장하며 나타난 선 하나 그려진 그림조차 당황스럽게 느끼고 있는 관객을 더욱 당황시키는 작품이 나타나는데요. 오늘은 이런 당황스러움 이상의 당황스러..
사진, 사물, 문자는 서로 딱히 공통점이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세 가지 요소이지만, 사실 사람은 이 세 가지를 굉장히 비슷한 과정으로 인지합니다. 오늘 살펴볼 조셉 코수스의 작품은 이러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인데요. 지나치게 당연한 사실이라 첫 만남에서는 ‘이게 어쨌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지만, 파고들수록 흥미가 느껴지는 숨은 재미를 가진 작품이기도 하죠. 우리의 머릿속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의자에 관한 경험과 함께 ‘의자’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존재하는데요.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의자’의 이미지는 평소 다양하게 만나는 물건 중 무엇이 의자인지를 구별하게 해줍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리가 아프고 피곤할 때 책상이나 밥상에 앉는 실수 없이 그 옆에 놓인 의자에 앉을 수 있..
예술은 언제나 보고, 느낀 것을 묘사하는 행위와 함께 해왔습니다. 돌과 나무를 조각하여 입체적인 조형물이나 조각상을 만들고, 평평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며 입체적인 공간과 사람, 사물을 표현해냈죠. 이렇게 사물, 인물, 공간을 표현해낸 미술은 ‘시간’이라는 새로운 도전과제를 만나는데요. 늘 함께하고 있지만,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시간이라는 존재는 이미 여러 작가에 의해 표현이 시도된 바 있죠. 오늘은 이렇게 미술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시간을 표현해낸 작품 하나를 살펴볼까 하는데요.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라는 쿠바 출신의 미국 작가가 내놓은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시계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무제:완벽한 연인(Untitled:Perfect Lovers)’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인데요. ..